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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에 대한 고집 이야기

열정의 발견자 2024. 1. 25. 09:26

성씨에 대한 고집 이야기


고집하면 대부분 안(安)씨, 강(姜)씨, 최(崔)씨를 언급합니다.

거기에 황소고집 황(黃)씨도 빼 놓을 수 없고요. 그들은 정말 고집이 셌을까요?
그리고 그들 중 어느 성씨의 고집이 더 셀까요?

들려오는 얘기로는 살아 있는 김(金)씨 3명이 죽은 최(崔)씨 1명을 못 이기고

최(崔)씨 셋이 모여도 강(姜)씨 1명을 못 당하며

강(姜)씨 셋이 모여도 안(安)씨 앉은 자리를 넘보지 못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오늘은 고집이 센 성씨의 유래를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안(安)씨가 고집이 세다는 이야기는 조선 태종 때 단종을 끝까지 추종하다 학살되고 최고의 명문가에서 천민으로 전락되었던 순흥안(安) 씨의 멸문지화에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정치적으로 낙인이 찍혀 크게 활약한 인물이 별로 없지만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독립 운동가 중 안씨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고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안씨의 고집이 독립운동에서도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강(姜)씨가 고집이 세다는 말은 고려말의 충신 강회중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고려의 유신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여러차례 벼슬을 권하였으나, 끝내 물리치고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에서 그의 마음과 기개가 사람들에게 강씨 고집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셋째
최(崔)씨 고집은 고려 말의 충신 최영장군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최영 장군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가 죽어 가면서
"내가 역적이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무성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내가 옳다면 나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아 후일 지독한 사람을 빗대 놓고 하는 말로 '최씨가 앉은 자리에는 풀도나지 않는다' 는 말이 회자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 ‘안(安), 강(姜), 최(崔)’와 고집과 견주어 절대로 밀리지 않는 성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황소 고집이라고 알려진 황씨 고집입니다.
얼마나 고집이 대단하길래 그렇게 불리웠는지 황씨 고집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영조 때 집암 황순승(1652 -1718)선생 때문에 황고집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
어느 날 마을 앞 개울에 다리를 새로 세웠는데, 다리 위를 덮은 흙에 하얀 석회가루가 섞어져 있자 인부를 불러 어디서 가져온 흙이냐고 묻자 “오래된 무덤 부근에서 흙을 가져왔다”고 하자 남의 무덤 흙을 밟고 다니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평생 다리위로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번째 이야기
어느 날 그가 한양에 다니러 갔다가 평양으로 되돌아 가려던 순간 우연히 친구를 만나 다른 친구의 부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다른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데 지금 입고 있는 의관 그대로 조문을 가는것은 ‘죽은 벗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라고 말한 후 1주일이나 걸리는 평양으로 가서 의복을 다시 정제한 후 조문을 갔다고 합니다.

세번째 이야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좋은 논을 조상제사에 사용할 쌀을 생산하는 용도로만 정해 놓고 그 논에는 절대로 퇴비를 쓰지 않고 쌀 뜨물로만 거름을 주며 정결하게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날 하인이 그 논에서 방귀를 뀌는 것을 보고 그 논에 물을 빼고 새 물을 대기를 3년을 하고서야 비로소 새로 농사를 지어 제사를 모셨다고 합니다.

네번째 이야기
어느 날 당숙과 함께 성묘를 갔는데 묘가 있는 산까지 얼추 20리(8km)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걸어가길래
당숙이 “왜 그러느냐?” 고 묻자 “조상의 묘가 있는 산이 보이는데 어찌 말을 타고 가겠습니까.” 라고 하였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황고집이라고 불릴만 하지요?